고전음악을 자주 듣지 않는 분들은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라는 작곡가가 생소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애호가들 사이에서 말러는 충성스러운 열혈 추종자를 가장 많이 거느린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다. 최근 음악계엔 말러 열풍이 불었다. 2010년 말러 탄생 150주년, 2011년 말러 사망 200주년, 전 세계 주요 악단은 너 나 할 것 없이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를 진행했고 공연장마다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는 유례없는 기현상, 이른바 말러 신드롬이 등장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말러의 음악에 깊숙이 빠져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중에는 10대, 20대 젊은 층도 많다. 말러는 10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교향곡의 기존 틀을 깨는 새로운 세계였다. 모든 것을 품어 하나의 세계를 음악적으로 구현하여 보여 주는 것이 그의 교향곡 철학이었다.
말러는 누구인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변방 보헤미아(지금의 체코)에서 태어나 ‘삼중으로 외로운’ 이방인으로 평생을 살았던 말러. “오스트리아에서는 보헤미안이며, 독일인들 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인, 유럽전체에서는 유태인으로 어디를 가도 이방인”이라고 스스로 말하곤 했다. 몇 가지 키워드를 통해 그의 곡절 많은 삶과 건강을 들여다보자.
첫째, ‘강박적 성격특성’. 말러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시골 출신, 여인숙이 딸린 술집이 집이었다. 독선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 술을 마신 날이면 어머니를 때리고 소리를 질렀다. 참다 못한 말러는 집을 뛰쳐나가 달리고 울곤 했다. 그래서 성공을 향한 집착이 매우 컸다. 20세에 지휘자 생활을 시작하여 강렬한 야망을 불태우며 음악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으로 불과 37세의 나이에 유럽 음악계 최고의 자리 비엔나 궁정 오페라극장 음악감독 직에 오르고야 만다. 그러나 양보와 타협을 모르는 완고함, 무자비한 완벽주의, 자기중심적, 고압적, 신경질적인 성격이 따라붙었다. 명예와 부을 얻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늘 높은 스트레스와 예민한 신경증이 그를 소모시킨 것이다. 물론 이런 신경증적 성격과 트라우마, 상처 가득한 정신역동이 바로 말러 음악 특유의 숭고한 신경증적(?) 아름다움의 바탕이라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둘째, ‘말러의 연인, 알마(Alma Mahler, 1879~1964)’ ‘비엔나의 꽃’ ‘비엔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 그녀의 공식 별명이었다.
유명 화가와 소프라노 가수의 딸로 태어나 열여섯에 니체를 줄줄 외우고 작곡과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운, 거기에다 미모까지 갖춘 여성이었다. 그녀의 남성 목록은 노트 한 권으론 부족하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열렬히 구애하여 그녀의 첫 키스 상대였다. 42세의 노총각 말러는 1902년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19살 연하 알마와 결혼했다. 말러 5번 교향곡 4악장 아디지에토는 알마에게 바치는 영원한 사랑의 고백이었고 6번 교향곡에도 알마의 주제를 새겨 넣었다. 8번 교향곡은 괴테 파우스트 마지막 문장 ‘영원한 여성성이 우리를 끌어올린다’라는 구원의 메시지를 감동적으로 노래하며 끝맺는데 여기서 말러의 ‘영원한 여성성’은 당연히 알마였다. 하지만 알마는 말러 한 사람에 만족할 수 있는 여성이 아니었다. 1910년 연하의 청년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노골적인 외도를 하며 말러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안긴다. 이로부터 채 1년이 안되어 말러는 숨을 거두었다.
세 번째 마지막 키워드는 ‘성홍열과 심장병’이다.
성홍열(scarlet fever)은 사슬알균의 감염에 의해 인후통, 발열, 피부발진을 만드는 급성 세균성 전염병이다. 페니실린 등 항생제로 적절한 치료가 가능하지만 시기가 늦어지거나 치료되지 않으면 류마티스성 심장병을 유발할 수 있는 질환이다. 말러의 큰 딸 마리아를 죽게 만든 병도, 말러의 어머니를 죽게 한 병도, 말러의 형제들 중 유년기에 죽은 6명의 사망원인도 바로 이 성홍열과 그 합병증인 심장병이었다. 말러 본인도 어릴 적부터 잦은 인후염에 시달렸고 결국 류마티스성 심장병과 연이은 감염성 심내막염으로 사망했다. 당대 뉴욕 최고 심장전문의 리브만(Emanuel Libman)이 최신의 기술로 혈액배양에서 사슬알균을 발견하였고 말러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페니실린이 개발되기까지는 30년을 더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말러는 알마를 언제라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비탄 속에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알마는 말러 사후에도 표현주의 화가 코코슈카, 그로피우스, 시인 베르펠, 신학자 홀른슈타이너 등 수많은 유력 남성과 염문을 뿌리며 팜므파탈로 살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1964년 85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눈을 감는다. 마지막 유언으로 고향 비엔나의 말러 옆에 딸들과 함께 묻히고 싶다고 했다. 비엔나 북서쪽 외곽 그린칭 묘지에는 말러와 알마, 큰 딸 마리아, 그리고 알마와 그로피우스 사이의 딸 마농이 함께 잠들어 있다.
같은 하늘 같은 땅 아래, 돌아온 사랑과 함께 누워 있는 말러는 이제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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